악한 마귀와의 영적전쟁에 대해 자주 설교하셨던 목사님께 한 성도님이 찾아왔다.
“목사님,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마귀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목사님은
“왜 마귀의 존재를 믿을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저는 마귀를 본적도 없고
만난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질문했다.
“성도님이 마귀를 만나지 못한 이유를 제가 말씀 드려도 될까요?
네! 그것은 성도님이 마귀와 똑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 방향에서 돌아서면 마귀를 즉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12절 정경조 목사
사막을 이동할 때 이동수단은 낙타입니다. 낙타에 짐을 싣고 낙타를 타고 이동합니다.
어두워지면 낙타 주인이 밤에 작은 텐트를 치고 바로 텐트 주변에 낙타를 묶어 놓습니다.
주인이 자려고 누워있으면 잠시 있다가 낙타가 텐트 안으로 코끝을 들여놓는다.
왜 코끝을 들여 놓을까요? 왜냐하면 낮에는 아주 뜨겁고 밤에는 너무 춥기 때문이다.
그러면 낙타주인은 단단한 채찍을 가지고 낙타의 코끝을 사정없이 내리칩니다.
여러분 너무하지 않나요? 낙타가 짐도 나르고 사람도 태워주고 죽어서는 살과
가죽을 남겨줍니다. 얼마나 도움을 많이 줍니까? 그런데 코끝을 내밀 때 가만히
있으면 그 다음에 오른발, 왼발이 들어오고 어느새 낙타 몸이 들어와서 결국 텐트를
무너뜨려서 주인이 얼어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낙타코 끝이 들어왔을 때
인정 사정 없이 때려서 나가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라는 놈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마음의 생각을 통해 접근할 때 아주 단호하게
예수이름으로 생각에서 떠나가라고 쳐 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외칠때 죄의 힘으로 부터 자유한 삶을 살아가며 동시에 죄로 부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다스리는 삶“을 저술한 스티브 멕베이의 책에 한 청년이야기 등장한다.
한 젊은 청년이 목사님을 보자마자 ”저는 저 자신이 정말 싫습니다!“라고 말했다.
왜 자신이 그렇게 싫으냐고 물었더니 그 청년은 ”저는 음란물 중독에 빠졌다“고 말했다.
아무리 안 보려고 다짐을 해도 어느새 음란 영상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청년은 자신을 증오한다고 고백했다. 질문 드립니다!
여기서 정말 이 청년이 음란물 영상을 즐기고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그 청년이 죄를 사랑했다면 목사님께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신을 증오함이 없이 아주 만족스럽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 청년은 죄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사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이고 죄를 반복해서 짓는 자신을 비참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청년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죄의 힘과 새사람된 자기 자신과 똑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즉 그 청년은 죄의 힘과 자신의 정체성인 새사람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죄책감으로
자신을 증오하고 미워했던 것입니다.
@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내 육신 안에서 역사하는 죄의 힘이 결코 새사람된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구별 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롬 8:6)
인생을 분주하게 살다보면 여러 가지 육신의 소욕을 경험하게 된다.
때로는 오래참지 못하고 조급해 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제일 먼저 저는 새사람으로 나는 육신의 소욕에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다! 라고 선포합니다! 그럴 때 육신의 소욕인 조급한 마음에
반응하고 자 하는 거품이 빠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동시에 오래 참음에 반응하는 새사람이 나라는 정체성을 생각할 때
마음의 평강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 5절-9절 정경조 목사여러분 사울과 다윗을 생각해 볼 때! 둘다 인생을 열심히 뛰어다니며 살았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죽이고자 열심히 뛰어다녔다.
한마디로 사울은 육신에 반응하며 육신의 소욕에 따라 살았던 대표적 인물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사울에게 계속 쫓기는 환경 속에서도 사울을 죽이지 않고 열심히
도망 다니며 뛰어다녔다. 아울러 다윗은 위기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 여쭈어보는 살았다.
그렇다면 과연 사울 왕과 다윗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육신과 성령의 차이였습니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었던 사울왕은? 하나님이 없는 자처럼 육신의 욕심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었던 다윗은? 성령의 뜻을 따라 성령님이 역사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로마서 8장 5절-14절 정경조 목사엄마의 뱃속입니다. 아기가 볼 때 완전 천국입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탯줄을 통해서 먹을 것과 영양분이 공급됩니다. 언제든지 잠 자고 싶으면
잠도 잘 수가 있습니다. 물속이라 자유롭게 수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더워도
40도를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너무 덥지도 않고 너무 춥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탯줄이 너무 불편하게 여겨졌다.
수영을 하면서 더 멀리 가고 싶은데 탯줄이 큰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그 아이는
그 탯줄이 정말 생명줄 인줄도 모르고 이도 없는 잇몸으로 3박 4일에 걸쳐 아주
힘들게 끊어내게 되었다. 그랬더니 갑자가 너무 자유로워졌습니다. 마음껏 수영도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전에 몸에서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탯줄이 끊어지는 순간 점점 죽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슬프지만 그 아기는 뱃속에서 최연소자로 죽음을 맞이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엄마와 아이는 둘이 아니라 탯줄을 통해 하나가
된 것임을 보게 됩니다. 아이가 뱃속에 있는 한 엄마와 아이를 절대로
분리할 수가 없다. 고린도전서 6장 17절 보면?
$ “주와 합하는 자는 한영 이니라!
Those who are joined to the Lord is one Spirit“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은 믿음의 탯줄을 통해서 나의 영과 예수님의 영이
연합해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뱃속에 있는 아기가 엄마를 통해서 생명을 누리는 것처럼 나도 내안에 계신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복음서 통해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 아버지께로 올 자 없느니라“ (요14:6)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안에 ,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장 5절)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공동번역 성경은?“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이 없어라”
여러분! 다윗이 정말 그의 인생에 아쉬움이 없었나요?
인간적으로 아쉬움이 무척 많았다.
다윗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많은 문제와 아쉬움이 있었나요?
만약 압살롬이 반역하지 않았다면?
다윗 자신에게도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아쉬움이 있었나요?
만약 그때 궁전 밖에 나가지 않았다면?
다윗은 수많은 문제와 아쉬움 속에서도 전혀 아쉬움이 없고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의 목자 되셨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인생에서는 무엇 때문에 아쉽습니까?
창세기 3장 1절-6절 정경조 목사1948년 크리스챤 집회가 암스테르담에서 있었다.
개회예배를 드리기 전에 강단 앞에 큰 관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의 장례식을 치르는 광경이었다.
사회자 인도에 따라 한 줄로 서서 관속에 있는 사람에게
얼굴을 보며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앞으로 나간 사람들이 한 사람씩 관속을 들여다보고 모두가
깜짝 놀랬다. 왜냐하면 관 속에 큰 거울이 놓여 있었고 그 관속을
들여다 볼 때마다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장례식이 아닌 바로 집회에
참석한 각자 자신의 장례식이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집회에서 함께
결정해야 될 많은 복잡한 문제가 있었지만 과거와는 다르게 전혀 의견충돌
없이 쉽게 처리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장례를
치룬 사람들이다
@ 모세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모세의 인생을 보시면 삼단계로 나눠진다!
1단계는 출생부터-40세까지: 궁중에서 애굽의 문화와 교육을 배우는
바로의 아들로“화려한 삶”이었다.
2단계는 41세에서 80세까지: 광야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양치는
목자로서 “초라한 삶”이었다.
3단계는 80세 이후부터 120세까지: 광야에서 영적지도자로 어떤 삶
살았나요? 지팡이 하나로“기적의 삶” 살았다.
질문 드립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궁중의 삶을 살았던 모세를 바로 쓰시면
되지 왜 40년간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시고 80세 이후에 쓰임 받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40년간의 초라한 삶을 통해서 모세로 하여금 철저히“자기 깨어짐”의
시간을 경험케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심은? 내 노력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기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깨어짐 통해 내 속에 계신“예수님의 생명을 나타내는 삶”에
관심 있으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 묵상하다가 만남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밥을 먹을 때면 언제든지 제 곁에 와서 저를 바라봅니다.
왜 바라볼까요? 먹고 있는 것을 좀 달라는 거에요!
또한 제가 아무것도 먹지 않을 때 저에게 와서 계속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왜 바라볼까요? 산책을 가고 싶거나 화장실을 가고 싶을 때 저를 바라봅니다.
동물인 만남이도 주인을 바라보면 주인이 다 알아서 먹을 것도 주고 산책도
시켜주는 것을 다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인을 바라보는 만남이를 생각해 볼 때
정말 내가 배워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4장 1절-14절 정경조 목사1. 예배공동체
예수님만 바라보는 교회 Just look to Jesus 24 Hours
2. 양육공동체
다음 세대 세우는 교회 Equipping Next Generation
3. 선교공동체
복음전도 실천하는 교회 Spreading the Gospel
4. 복음공동체
은혜와 진리 충만한 교회 Unlimited Grace and Truth
5. 치유공동체
가정을 회복시키는 교회 Strengthening the Family